
오랜만에 하루키 소설을 만났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독특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버렸어요.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은 제목처럼 강렬한 사건으로 시작한다기보다는, 서서히 주인공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열리죠. 서른여섯 살 초상화가인 주인공이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를 받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친구 아버지의 산속 아틀리에에 머물게 되는 설정이 참 하루키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 그리고 익숙했던 세계와의 단절. 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도 묘한 불안감을 심어줍니다. 주인공의 심리가 워낙 섬세하게 묘사되어서, 읽는 내내 마치 제가 산속 아틀리에의 고독한 공기를 함께 마시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고독과 상실은 하루키 소설에서 늘 중요한 배경이 되어 왔잖아요. 이번에도 그렇구나 싶었지요.
이야기의 전환점은 역시 아틀리에 천장에서 발견된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입니다. 일본화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남긴 이 미발표작이 모든 기묘한 사건의 발단이 되죠.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그림 자체에 대한 묘사가 워낙 생생해서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예술 작품이 현실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치로 쓰이는 방식이 흥미롭다고 봐야 합니다.
그림을 발견한 뒤, 주인공의 삶에는 두 가지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아틀리에 뒤편 돌무덤에서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의 근원을 파헤쳐 드러난 석실, 그리고 그 석실과 그림을 통해 현현하게 되는 기사단장이라는 이데아예요. 키 60센티미터의 작은 기사단장이 나타나서 주인공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역시 하루키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니까요. 그의 존재는 현실의 논리를 벗어난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처럼 느껴졌어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골짜기 건너편 호화로운 저택에 사는 백발의 신사, 멘시키 와타루입니다. 막대한 부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멘시키가 주인공에게 거액의 초상화 작업을 의뢰하고, 기사단장의 현현과 관련된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는 모습은 1권을 이끌어가는 긴장감 넘치는 축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멘시키가 가진 어떤 어두운 의도나 배경이 있을까 계속 궁금해하며 읽었어요.
1권 현현하는 이데아 편은 주인공이 자신의 상실과 고독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이데아와 멘시키라는 현실적이지만 불가사의한 인물 사이에 놓이면서 미스터리가 증폭되는 과정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특히 멘시키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예술가적 고뇌, 그리고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에 대한 묘사는 역시 초상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설정의 묘미를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난징 대학살과 같은 역사적 무게감 있는 주제가 배경처럼 깔려 있다는 점도 이 소설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죠. 아마다 도모히코와 그의 동생에게 얽힌 과거사가 앞으로 주인공의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해집니다. 1권은 이 모든 미스터리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독자 앞에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답니다.
솔직히 번역에 대한 호불호는 늘 있는 것 같지만, 저는 홍은주 번역가 특유의 간결하고 덤덤한 문체가 하루키의 세계를 꽤 잘 전달해준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덕분에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도가 높았고요.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2권 전이하는 메타포 편에서는 이 모든 기묘한 일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답니다. 주인공의 상실된 삶이 이데아와 메타포를 통해 어떻게 회복되거나 변모할지, 그 결말이 궁금하다면 꼭 1권을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이만하면 1권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정리된 것 같네요.